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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의 건국과 멸망의 과정에 대해 살펴보고 발해가 왜 우리나라 역사인 이유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발해 건국
고구려는 약 700년 동안 한반도 북부와 중국 동북 지역에서 번영한 고대 국가였으며, 동북아시아를 지배했습니다. 이 성장은 고구려의 뛰어난 사냥과 기마 기술 덕분이었지만, 668년 당나라의 침공으로 결국 멸망하게 되었습니다. 고구려의 멸망 이후, 장수의 아들 대조영은 아버지와 함께 당나라로 이주해 영주에 정착하였습니다. 영주에서 기회를 기다리던 대조영은 당나라와 돌궐 간 전쟁이 일어난 틈을 타 고구려 유민들을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고구려 인들이 영주에 부족했기 때문에, 대조영은 말갈족과 연합해 힘을 모았습니다. 대조영은 무기와 병력을 갖춘 뒤, 고구려 멸망 30년이 지난 698년에 당나라를 떠나 요동으로 건너가 새로운 나라를 세웠습니다. 처음에는 '진국'이라는 이름으로 시작했으며, 713년에 '발해'로 국명을 변경하였습니다. 결국, 발해는 고구려의 후예들이 세운 나라로 동북아시아 역사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현재도 여러 역사 연구자들의 관심사로 남아있습니다.
발해 멸망
발해가 멸망한 이유에는 발해는 지배층과 피지배층이 다른 민족으로 구성된 다민족 국가로 정치적 불안감과 내전이 잦았던 국가였습니다. 818~830 발해 선왕의 재임기간 동안 대부분의 말갈족을 복속하고 남쪽으로 신라와 국경을 접하고 서쪽으로 요동까지 진출할 만큼 해동성국으로 불리던 강력한 나라로 성장했지만 내부의 갈등을 이겨내지 못했고 균열이 일어난 상황에 결국 926년 이왕 대인선, 거란 야율아보기의 침입으로 상경의 홀안성이 함락되며 멸망하게 됩니다. 이후 929년부터 약 10년간 후발해를 건국해 발해의 부흥을 꾀했으나 실패하고 발해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됩니다.
발해가 우리나라 역사인 이유
중국 고서에서는 발해를 건국한 대조영이 한국인으로 기록되지 않았으며, 발해의 대다수가 말갈족 등 다른 민족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발해가 우리나라 역사임을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조선시대 후반까지 이르러 발해의 기록이 우리나라 역사의 일부로 주장되고, 발해의 유적과 유물 연구를 통해 우리나라 역삼임이 밝혀졌고 삼국시대와 통일신라 시대로 이어지던 것에서 남북국 체제(발해와 통일신라)로 변경되었습니다. 대조영이 이끄는 발해는 고구려 유민들과 말갈족 등 다른 민족들을 모아 세운 국가로, 고구려 땅을 기반으로 합니다. 또한, 발해의 왕족과 거위층은 고구려를 기반으로 건국되었습니다. 발해는 공문서를 통해 일본, 신라와 교류할 때 '고려(고구려)' 이름을 사용하였으며, 이 사실은 발해가 고구려의 후예이자 한국의 역사라는 입증이 됩니다. 또한 발해의 유물과 유적은 고구려 문화 계승 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입니다. 발해 문왕의 둘재 정혜공주묘와 같이 고구려 무덤 양식과 비교될 수 있는 유적이 발견되었으며, 온돌로 덮인 구조물이 발굴되었습니다. 온돌은 고대 한반도의 전통 난방 방법으로 고구려에서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런 자료들을 통해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한 역사적 사실을 확인할 수 있으며, 동북아시아 역사에 있어 발해의 중요성이 강조됩니다.